문득 노트를 읽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혼자이기를 바라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 문제를 풀어야 할 때, 나는 셜록 홈즈를 생각하곤 했다. 그럴 때 인생은 불가능한 것들의 해자로 둘러싸인 성채 같은 것. 아니, 아무리 걸어도 도무지 반대면이 나타나지 않는 듯한 뫼비우스의 띠 위. 나는 이미 '뒤집어져' 있지만 '뒤집어진' 것을 모른다. 혹은 '뒤집으려' 노력하다가 절망한다. 그럴 때 셜록 홈즈를 생각한다 함은, 문득 노트에서 발견한 아래와 같은 낙서 속의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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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셜록 홈즈가 한 말을 알고 있다.
불가능한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아무리 가능성 없어 보여도, 답이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들을 먼저 늘어놓고 보면 대개는 그 사이로 외길이 생긴다.
내가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러니까, 애초에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
문득 펼쳐본 노트에는 이런 글도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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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고 보드랍게 한들거리는 꽃잎의 연약과 가는 꽃줄기의 구부러짐, 하늘에서 음표가 쏟아져 나를 시공 밖으로 데려가는 것 같은 음악의 한순간, 재능 있는 자가 집념을 갖고 발전해가는 섬세한 성취를 응원하는 것, 너무 절묘하여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며 감탄하게 되는 아름다운 문장, 단어를 하나하나 도드라지게 생각해볼 때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 으슬으슬 한기가 들 정도로 무서워지는 것, 세상의 모든 군더더기 없음, 우아함.


***
저 글을 적었을 때의 나에게 약간의 동정을. 곧이라도 중력을 벗어나 밖으로 튕겨나갈 태세가 아닌가. 물론 나는 여전히 저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그저 다른 것들을 더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남과 다른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취향의 구축에는 더이상 연연하지 않게 된지 퍽 오래이나, 나도 모르게 인생의 구축에 대해서는 끝까지 콧대 높이는 바가 있었던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해지니 시야가 조금 환해진다. 나는 통속적으로 괴로워하고 통속적으로 헤쳐가는 인간일 뿐이므로, 또한 통속적으로 몰입하고 통속적으로 행복해진다.

내가 나여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남인 척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내가 나인 척 하고 살게 되면 큰일이다. 나는 늘 바라던대로 어느 쪽도 아닌 길로 한 발짝 디뎌, 부엌 싱크대 위에, 런닝머신 발판 위에, 어느 허름한 고깃집 불판 위에, 아무런 딴 마음 쏟지 않는 말짱한 노동의 자판 위에, 지루하게 같은 시각에 지루하게 같은 목적으로 애인님께 거는 전화의 목소리 속에, 조금씩 나를 나누어 뿌린다. 이런 식의 통속으로 인한 평안함이 좋다고, 부끄럽게 적는다. 이것으로 모든 비밀을 누설하였다. 비밀을 누설하였다 함은 오로지 나만 아는 암호이지만, 사실은 액면 그대로의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암호가 필요없다.
by starla | 2008/03/04 23:23 | la dolce vita | 트랙백 | 핑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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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seavillage's sto.. at 2008/03/06 23:35

... starla의 글 (문득 노트를 읽다.)을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지성인이다.그의 글에서 그의 비밀 아니, 고백을 들어 보자."저 글을 적었 ... more

Commented by 달아난사람 at 2008/03/05 00:08
그대의 우아함에 짝짝짝.

아름다운 잔에 담긴 와인 한잔을 마음으로 보내드립니다.
치즈 한 쪽과 잘 익은 포도 1/4송이도...
Commented by panky at 2008/03/05 12:07
늙지 않고 어른이 되어가는 언니에게 박수를...
Commented by seavil at 2008/03/05 14:51
starla 우리 밥먹자고 한 약속은 어떻게 될까?
Commented by at 2008/03/06 18:57
니가 번역한 책 잘 읽고 있다.^^
번역 괜찮더라....
-친구
Commented by starla at 2008/03/07 12:05
달아난사람 님/ 고맙습니다. ^^ 달아난사람 님도 그 골치아픈 문제 잘 풀리셔야 할 텐데... 와인은 받은 셈치고 열심히 마시겠습니다. 엣헴!

panky/ 아직 멀었어... 깡깡 멀었다구...

seavil/ 선배! 화요일이요! 문자 드려야지~

창/ 누굴까... 내가 아는 '창' 들어가는 친구가 설마 그?
Commented by seavil at 2008/03/07 16:06
starla 화요일 저녁은 안된다. 낮에 시간되면 좋을텐데... 스모키살롱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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